남자를 직이는 여자.-기만 당하는 멀린.

이재구	2007-10-03 10:29:23, 조회 : 4,027, 추천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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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와 함께 관능미 물씬한 여인 그림으로 유명한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의 작품 중에 ‘멀린의 기만(The Beguiling of Merlin·1874)’이란 게 있다. 멀린은 아서 왕 신화에 나오는 마법사인데 산사나무에 기대 앉은 그 앞에 여인 니무에가 책을 들고 서 있다. 그녀의 피부는 희다 못해 투명하고 옷 주름 사이 드러난 자태는 숨 막힐 듯 고혹적이다. 아름다움에 취해 넋이 나간 멀린에게 사랑을 약속한 대가로 니무에는 막 마법책을 얻어낸 참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터득한 그녀는 주문을 외어 멀린을 가둬 버린다. 니무에의 머리를 월계관처럼 장식하고 있는 뱀이 그런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이었던 것이다.

검찰 소환이 거듭되면서 갈수록 초췌해져 가는 변양균씨와 반대로 활기를 되찾고 있는 신정아씨를 보면서 퍼뜩 이 그림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 때문일 터다. 위험하면서도 널리 퍼진 두 시각이다.

하나는 남자들의 시각이다. 변양균을 팜므 파탈 신정아의 희생자로 보는 것 말이다. 팜므 파탈이란 게 애당초 남성우월주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괴물일지니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변양균을 잘 알던 사람들(남자들)의 대부분 증언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르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인 말대로 30년 공직생활을 헛되게 하지 않았는데 막판에 ‘여우’를 만나 인생 ‘종쳤으니’ 딱하다는 거다. 평생 한눈 팔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왔는데 더 늙기 전에 멋진 연애 한번 즐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낭만파도 있다. 이런 논리 속에서 변양균은 본질적으로 ‘착한 남자’다.

다른 하나는 여자들의 시각이다. 그래, 신정아를 팜므 파탈이라고 치자. 근데 뭐가 문제냐. 능력 있는 남자 만나 즐겁게 해주고 도움 받았는데 뭐가 나쁘냐는 식이다. 거짓말 조금 했지만 세상 살면서 거짓말 한두 번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거다. 세상에 남을 꼬드겨 사지로 이끄는 남자, 옴므 파탈(homme fatal)이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는 얘기다. 저 잘 아는 남자들의 약점을 이용코자 팜므 파탈을 고용한 미인계를 쓰는 게 남자들 아니냐는 반격이다.

이런 논리는 최근 넘쳐 나는 ‘커리어 우먼 지침서’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여성이 사회적 성공을 거두려면 나쁜 여자가 돼야 한다”는 책들의 주장은 20~30대 직장 여성들에게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고전적인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모나리자 신드롬’은 던져 버리고 남자 것 뺏더라도 내 밥그릇 꼭꼭 챙기는 ‘나쁜 여자’로 살자는 얘기다. 이런 주장은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다 간다”는 논리로 확장되고 가끔은 “돈 많은 남자 이용하는 건 부의 재분배”라는 극단으로까지 비약한다. 극점에 서 있는 신정아는 ‘나쁜 여자’다. “권력 있는 남자 이용하는 건 평등 실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연애라는 게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인지라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고, ‘나쁜 여자 신드롬’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자는 의지의 반어법적 표현일 테니 오히려 격려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런 착한 남자와 나쁜 여자가 만났을 때다. 특히 권력 있는 착한 남자와 야심 있는 나쁜 여자가 만나면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바로 그래서 국고가 새고 예산이 낭비되며, 대학과 미술·불교계의 신뢰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게 이번 사건의 본질 아닌가.
또 다른 ‘착한 남자’와 ‘나쁜 여자’들이 세상에 다수 존재하는 한 그들의 조합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일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휘발성 만남들이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을 게 분명한 걸 생각하면 섬뜩해진다. 철 지난 납량 특집이다.

***위의 그림 `멀린의 기만` 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아래 페이지에 있으며
글 부분은 10월2일자 중앙일보 컬럼 시시각각(이훈범 논설위원)서 퍼 온것임.

http://blog.daum.net/butterfly0508/1032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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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9:38:25